2016 21

산티아고 순례길, 뒤돌아볼 땐 얼굴을 찌푸리지 말자

- 하루 종일 해가 내리 쬔다. 밤 열시가 되야 해가 진다. 해가 지면 잠에 든다. - 빨래가 아직 덜 말랐는데 해가 벌써 졌다. 불이 다 꺼지니 달빛이 유독 더 밝아 보인다. 달빛에 의존해 오늘 일기를 쓴다. 컴컴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어차피 예쁜 글씨는 아니니까. 노트 밖에만 쓰지 않으면 되지 뭐. - 하루를 기록 한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을 그 때를. 그 때 느꼈던 그 감정 그대로 적는다. 내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걸 내 일기장은 증명해 줄 수 있다. - 오늘 내 하루가 어땠는지 적으려는데 기억 나는게 없다. 중간에 에스프레소 한 잔 사먹으려고 1유로를 썼고 알베르게 값으로 10유로를 지불했다. 이건 가계부야? 일기장이야? -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 하니. 청보리 밭 사이..

산티아고 순례길,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가 않는다.

- 여전히 먹고 싶은건 없다. 하지만 배는 고프다. 입에 뭐라도 넣어 본다. - 일어나 사과 한 쪽. 가게들이 문을 열었으니 커피 한잔과 보카딜로Bocadillo 하나. 갈증이 날 때마다 물 한 모금.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는 파라솔 밑에서 콜라 한잔. 한국인은 밥심이니까 저녁으로 빠에야Paella 한 그릇. - 너무 뜨겁지도, 세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햇살이다. 그냥 맞고 있으면 화상을 입어 버릴 정도로 스페인의 태양은 너무 강렬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마을 하나를 지나가는데 작은 개천 옆에 카페 하나가 문을 열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커피 한잔의 매력은 날 꼬시기에 충분했다. 잠깐 저기에서 열 좀 식히고, 배 좀 채운뒤에 걸어볼까. 평소와 다르게 초리조Chorizo 샌드위치를 하나 주..

Cerveceria Titanic, Spain

산토 도밍고의 인상적인 가로수. 지나가는 마을이라 잠깐 요기만 하고 지나갔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하루쯤은 머물고 싶은 마을이다. 곳곳에 맛있어 보이는 가게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다시 가고 싶은 세르베세리아 타이타닉..!! Pinco especial 오이 피클에 참치를 넣고 양파랑 피망 잘게 썰은 것을 위에 얹은 뒤 올리브 오일을 뿌린건데. 도대체 이거 뭐지?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빵으로 접시까지 싹싹 닦아 먹었다. Pimientos rellenos 피망에 들어가 있었던건 아니지만. 흡사 전 같다. 맛있었는데 뭐라고 묘사해야할지 모르겠다. Tortilla 또르띠야Tortilla 는 어느 동네, 어느 펍을 가나 볼 수 있다. 이름은 또띠야인데 스페인식 오믈렛이다. 어딜가나 그 집만의 고유의 맛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 앞을 보고 걸을지 발을 보고 걸을지

- 달팽이를 참 많이도 봤다. 내가 평생 볼 달팽이들을 다 보지 않았을까. 난 그냥 돌맹인줄 알았는데 그게 다 달팽이더라. - 집도 없는데 토실 토실하게 생겨서 꽤나 몸 집이 큰 까만색 민달팽이. 이 녀석 이름이 뭘까? 찾아 봐야지 찾아봐야지 했는데 아직도 안 찾아봤다. 내일은 꼭 찾아봐야지. - 길 위에서 달팽이 한마리를 만났다. 이 마른 땅을 위에 어쩌다 올라왔는지. 쳐다보고 있으니 부지런히 속도를 내어 기어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금도 돌아가지 않고. 무조건 앞만 보고 간다. 돌맹이 하나가 길을 가로 막았다. 뾰족하게 생긴 못생긴 돌이었는데. 그걸 피해가지 않고 기어 올라 결국 넘어 간다. 몰랐던걸까. 알면서 그랬던걸까. 앞만 보고 가는구나. - 열심히 걸어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그 목적지..

산티아고 순례길, 시속 3km

- 하는 일이라곤 걷는 것 밖에 없을거라 생각했다. 오늘,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도 걷고, 또 걷고. 하지만 나에겐 하루 일과가 있었다. 생각치도 못했던 일.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800km를 걷는다는건 생각보다 계획이 필요한 일이었다. - 어디로, 언제까지 걸을 것인가? 산티아고까지 걸을 것이다. 내 몸이 허락하는한 끝까지 걷고 싶다. 산티아고 추후 일정은 정해지지 않기에 일정에 여유는 많은 편이다. 산티아고까지 약 800km가 안되는데 그렇다면 하루에 얼마나 얼마동안 걷는가? 내 몸의 컨디션과 길의 난이도를 고려하여 하루에 2, 30km 씩 걸으려고 한다. 중간에 하루 이틀 씩 쉴 것을감안해서 총 일정 3, 40일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다. 묵을 숙소는 정했..

산티아고 순례길, 뿌연 안개 속 텅빈 머리 통

- 새벽에는 어젯밤 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고, 피레네의 날씨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었다. 기상 예보에선 오늘, 내일이 지나야 날이 갤 것 같다고 했다. 겨울에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 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때문에 길이 통제되는 기간도 있다고 들었고, 얼마전에는 눈이 내렸다는 걸 들었기에 신경이 곤두섰다. 워낙에 첫 날부터 높은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다가 27키로미터는 가야 숙소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돌아올 수도 없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땐 따져봐야 하는게 많았다. 어제와 같이 길에서 바들 바들 떨고 싶진 않았다. - 길이 통제 된 건 아니니 위험하지 않을 거라, 이 정도 비라면 걷는데 무리도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출발한 사람들도 있었기에 그들을 따라 가다보면 길은 헤매지 않겠지. 우비를 입을까하다 옷만..

산티아고 순례길, 잊을만하면 그는 내 뒷통수를 친다.

- 올해 초 나는 심신이 꽤나 약해져있던 상태였다. 일은 힘들었고, 내 마음은 더 나약해졌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을 그만두고,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한달 동안 집안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낸 뒤에. 나는 가진 돈을 탈탈 털어 파리로 출발했다. 파리는 나의 로망을 가진 도시였고, 순례자의 길은 나의 도피처였다. 내가 바라는건 파리의 로망을 지키는 것이었고. 순례자의 길에서 내가 가진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던지, 생각을 비우던지, 아니면 해결책을 찾는것이었다. 뭐라도 하나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랬으면 싶었다. 정말 단 하나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 지푸라기 잡는 심정 치고는 너무 멀리까지 온거 아닌가 싶었지만. 한국 사람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