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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왜 여기까지 오는거야?

MUSON 2021. 12. 17.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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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보면 이런 저런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아무래도 예전보다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하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야고보 성인이 걸었던 순례 길을 걷는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들로 국한되어 있지 않다.
국적, 문화, 종교가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각기 다른 이유에서 이 길을 걷는다.

 

 

 

Camino de Santiag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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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성인이 선교를 위해 스페인 땅 위에 올랐다.
그 옛날 제대로 된 신발 없이 그는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포교를 하며 긴 여정을 시작했다.
순례길을 걷는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누군가 다음 마을까지 짐수레에 태워준다고 했을때 야고보 성인이 '아닙니다. 저는 오직 걸어서만 선교활동을 할 겁니다.' 라고 말했을까?
그가 어떻게 길을 걸었는지 중요한게 아니라, 그가 산티아고까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걸었는지가 중요한게 아닐까.
그는 이 길위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Camino de Santiag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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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길을 걷는 이유는 무슨 목적에서 일까.
지금 아니면 안되겠단 생각으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몸은 만신창이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져만 간다.
생장에서 출발한 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니 길을 걷는 방법, 몸을 추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익숙해졌지만 이 길 위에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나 자신에 대해서만 오롯이 집중하면 되니 더 복잡해졌다.
이정표에 보이는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가 계속 나를 조급하게 만든다.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목표 없이 과정을 겪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가 있기에 하루 하루가 조심스럽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보고 싶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조급한 걸까.

내가 이 길을 걸으면서 깨달을 수 있는건 과연 무엇일까.
나는 몰랐던 나의 치부, 나의 민낯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알 수 있는 오만했던 나 자신에 대한 겸손?

내가 이걸 극복 해낸다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확신도 걱정도 없다.
결국은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다.
잡생각만 많고, 불안해하고, 조급해하고.

신체적 건강을 위했다면 헬스장에 가서 개인 PT를 하는게 맞았을건데.
정신적 여유를 원했다면 하와이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는게 맞았을건데.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뭐하자고, 뭘 얻겠다고 새벽같이 일어나 7키로나 되는 짐을 지고 30키로를 걸어 간 뒤 다시 벙커침대에 쳐박혀 몸도 제대로 뒤척이지 못하면서 곤두선 신경으로 잠자는 생활을 반복하는 걸까.
나는 왜 이런 행군을 하고 있는 걸까.

길 위에서 찾을 수 있는건 뭐가 있을까.

내에 대한 배려, 상대에 대한 배려를 배우려고 온게 아니다.
온전히 나만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
그 한계에서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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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부리지 말자.
여기서 뭔가 얻기를 바라지 말자.
하물며 생각을 비우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자.
그렇게 하자.

내 몸은 내가 챙기고, 내 정신은 내가 챙긴다.
이 길은 내게 줄 수 있는거라곤 순례길이라는 이름 뿐이다.
바라는 만큼 실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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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자 사무실에서 나눠주는 완주증이 의미하는건 '당신은 건강합니다.' 라는 의미가 아니다.

 

 

 

Camino de Santiag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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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히 아는거 아닌가.
주님이라고 뭐 별거 있을 줄 알았나.
그가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신'이라는 이름에 기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는 정의를 구현해 줄 수도 없고.
가난과 질병에서 구원해 줄 수도 없고.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을 구별해 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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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그 때문에 마음 아프지만 그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