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았던 곳/해외

산티아고 순례길, 뿌연 안개 속 텅빈 머리 통

MUSON 2021. 12. 17.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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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는 어젯밤 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고, 피레네의 날씨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었다.
기상 예보에선 오늘, 내일이 지나야 날이 갤 것 같다고 했다.
겨울에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 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때문에 길이 통제되는 기간도 있다고 들었고, 얼마전에는 눈이 내렸다는 걸 들었기에 신경이 곤두섰다.
워낙에 첫 날부터 높은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다가 27키로미터는 가야 숙소가 있기 때문에 중간에 돌아올 수도 없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땐 따져봐야 하는게 많았다.
어제와 같이 길에서 바들 바들 떨고 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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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통제 된 건 아니니 위험하지 않을 거라, 이 정도 비라면 걷는데 무리도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출발한 사람들도 있었기에 그들을 따라 가다보면 길은 헤매지 않겠지.
우비를 입을까하다 옷만 단단히 입고 출발했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가시거리가 5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비는 많이 오지 않았지만 짙은 안개 속을 걸어야 했고, 어느새 머리칼 사이로 물방울이 맺혔다.

분명 내 앞에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새 혼자였고, 어느샌가 인기척이 들려 뒤를 돌아보면 다른 순례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 숙소를 가득 채웠던 그 사람들이 분명 모두가 이 길 위에 있을텐데.
바로 코 앞의 것들 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오롯이 혼자 있는 것 같았다.
험한 산길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가장 좋은 풍경을 자랑한다는 나폴레옹 길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이 되어 있었다.
간간히 자동차도 한 대씩 지나갔다.

 

 

 

Camino de Santiago 2016
Camino de Santiag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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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안개 속에서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자니 러닝머신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몇 시간 동안 계속 걸어도 걸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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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고.
이게 맞는건가 싶고.

 

 

 

Camino de Santiago 2016
Camino de Santiag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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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는
소도 있고,
말도 있고,
노란 화살표도 있었다.

 

 

 

Camino de Santiago 2016
Camino de Santiago 2016
Camino de Santiago 2016
Camino de Santiag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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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날이 개기 시작한걸까.

어느새 산맥 꼭대기까지 다다랐다.
이게 구름인지 안개인지.
산을 오르고 나서야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면 물안개가 산등성이를 꾸물 꾸물 넘어갔다.
우르르 내려가기도 하고, 우르르 몰려 오기도 했다.
나는 계속 제자리를 걷고 있다 생각했는데, 산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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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맞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을 뿐.
길이 어느새 끝나 있었다.
혼자 이 길 위에 외로이 서 있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도착하는 시간과 방법이 달랐을 뿐, 모두가 길의 끝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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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
어차피 너나 나나 한끝차이.
어차피 너나 나나 끝나는건 똑같다.

 

 

 

Camino de Santiago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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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새에 국경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