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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놓인 길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최고의 집을 지어 살았다. 큰 집이었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했고 여러 보수공사가 필요했기에 나는 그에게 손을 나눠주었다. 보상으로 그는 나에게도 집을 지을 수 있는 땅, 자재, 도구를 지원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그처럼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졌다. 그의 집을 지을 때 썼던 것과 동일한 재료들로 지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나무를 자르고, 벽돌을 쌓았다. 나도 그처럼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랐고 그 또한 내가 본인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진심으로 빌어주었다. 하지만 내 집은 완성되기도 전에 바람이 불어 벽이 무너졌고, 비가 내려 목재가 상했다. 나는 그의 집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집은 오랜 공사 끝에 튼튼했고 더 이상의 다른 공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해 보..

카테고리 없음 2022.04.01

무제

꽃을 따다 준다고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호수 저 밑에 고요하게 앉아있는 모래처럼 살았다. 바위에 붙은 이끼처럼 가끔씩 다가오는 물결에 몸을 적셨다. 썰물에 떠내려가지 못해 뭍에서 퍼덕이는 이름 모를 물고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보지 못하고 발로 챌까 봐 자리를 지켰다. 파도에 바위가 들썩이는 소리가 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길을 잃는다.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여기저기를 서성인다. 빛을 내어보지만 눈을 잃었다.

카테고리 없음 2022.04.01

신메뉴

저 테이블 끝에 올려져 있는 찻잔이 보기 불편하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치고 지나갈 것만 같다. 흔들리게 위치한 것도 아니지만 제발 저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찻잔을 가운데로 옮겨주었으면 한다. 그 사이에 누군가 그 옆을 지나간다. 덜컹. 혹시나 누군가랑 눈이 마주칠까 신경쓰지 않는 척 시선을 돌렸다. 찻잔이 받침에 내려 앉는 소리가 들린다. 덜컹. 새로운 메뉴를 만들었다며 시음을 해달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 찻잔에서 눈은 뗐지만 귀는 바짝 곤두서버렸다 혀가 마비된 느낌이다. 전에 있었던 메뉴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덜컹. 뭐에요? 놀랐어요? 그 정도예요?

카테고리 없음 2022.04.01

루마니아 풍습 - 황유원

루마니아 사람드른 죽기 전 누군가에게 이불과 담요, 베개를 물려준다고 한다. 골고루 밴 살 냄새로 푹 익어가는 침구류. 단단히 개어놀고 좀 울다가 그대로 간다는 풍습. 죽은 이의 침구류를 물려받은 사람은 팔자에 없던 불면까지 물려받게 된다고 한다. 꼭 루마니아 사람이 아니더라도 죽은 이가 꾸다 버리고 간 꿈 냄새를 맡다 보면 너무 커져버린 이불을 이내 감당할 수 없는 밤은 오고 이불 속에 불러들일 사람을 찾아 낯선 꿈 언저리를 간절히 떠돌게 된다는 소문.

카테고리 없음 2022.04.01

화요일

그는 목요일에 태어났다고 했다. 순간 나는 멍했다. 새하얗게 변한 내 머릿속이 내 얼굴에 드러난 거겠지. 머릿속의 새하얀 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달력을 되돌려 보았다. 내가 태어난 날은 화요일이었다. 나는 화요일에 태어났다. 왜 하필 화요일이지. 그는 목요일이 좋다고 했다. 본인이 태어난 날이 목요일이라서가 아니라 나무가 있기 때문에 좋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나도 나무가 좋다. 나도 목요일에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왜 난 화요일에 태어났지. 이어 하는 말이 자신의 사주풀이를 해보니 나무를 피하는 게 좋다고 했단다. 그러면서도 그는 책상 위에 화분을 하나 올려두었다고 했다. 나무가 불을 가까이하지 않고 나무를 가까이 하니 더 좋은 걸까.

카테고리 없음 2022.04.01

이끼

노부는 아들이 참여한다는 행사가 궁금했다. 어떤 이유로 아들이 초청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다양한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다니 그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궁금증은 생기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아들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집을 나서는 길은 그리 좋지 않았다. 구름이 하늘을 메우고 있어 점점 어둑해져 가는 듯했다. 아침부터 일찍이 나간 아들이 우산을 가져갔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지팡이 대신 들고 나온 구부러진 손잡이를 가진 우산이 걱정을 덜어주었다. 느릿하게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기다렸다. 문이 열렸을 뿐인데 저 멀리 환한 빛이 보였다. 그는 자연스레 빛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아버지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비도 오는데."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결국 비가 오기 시작했나 보다. 촬영 ..

카테고리 없음 2022.04.01